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괄의 난 (문단 편집) === 안령(무악재) 전투 === 정충신의 예측대로 이괄은 관군이 안령(무악재)에서 자리를 잡으면 한성의 민심이 이반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한성 농성을 포기하고 정면으로 대결을 결심한다. 이괄은 안령을 점령한 정충신의 병력이 작은 규모라는 점을 파악하자 '[[패기|저 정도 병력은 점심 먹기 전에 처리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는지, 방을 붙여 '''큰 싸움이 있으니 구경하고 싶은 자는 오라, 관군을 [[정복]]하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정권이 교체된 직후라 한양 민심은 유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영웅인 광해군은 궁궐공사로 민심이 낮았으나,[* 인조는 광해군이 "폐[[인목왕후|모]]·살[[영창대군|제]]를 하였다"는 명분을 세워 그를 폐위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조측도 집권 직후라 권위가 확고하지 않았고, 이괄 측도 별다른 사직 상의 드라마도 없고 행실이 나빴던 흥안군을 내세워 인조보다 명분이 빈약했다. 누가 이기는지 보자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배 계급끼리의 전투를 일반 백성들이 남 일 보듯 구경했다는 사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발견된다.] 이리하여 이 전쟁의 메인 이벤트는 2월 11일 묘시(5~7시)에 수많은 백성들이 몰린 가운데 펼쳐지게 된다. 이괄의 군대는 이미 실력을 보인 항왜들을 앞세웠고, 북방에 배치되었던 조선의 최고 정예 군단을 끌고 내려온 것이었으나, 이에 비해서 관군은 급조된 지방 병력인 데다 2천 명밖에 안 되는 등 전력이 딸렸기에, 선봉을 맡은 선천 부사 김경운이 전사하고 토벌군 전체까지 궤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정충신이 높은 곳에 견고한 진지를 확보해 놓았기에 이괄 군은 진격 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었고, 점심을 먹기 전에 끝내겠다던 생각과는 달리 전투는 2시각(4시간)이 지난 사시(9~11시)까지 지속되어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는다. 정충신은 유효걸(이순신의 부하인 유형의 아들)을 거느렸고 휘하에 남이흥과 변흡은 고개 안에서 진을 쳤으며, 김완(이순신 휘하의 장수와 동명이인)이 고개 서쪽을, 신경원과 이정이 고개 북쪽을 막고, 황익·안몽윤·최응일·이경정을 중견사(中堅使)로 삼고, 이확은 포수 100명을 거느리고 치마 바위에 주둔해 창의문 길목을 틀어막았다. 정충신이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권율]]의 곁에서 종군했던 것을 고려해보면 입지 선정을 잘 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일본 측의 명장이나 우수한 참모들이 죄다 달라붙었음에도 승리했던 전투를 권율 곁에서 함께 경험해본 인물이다. 격전 중 이괄의 진영으로 엄청난 돌풍이 불었고, 이 틈을 타 관군이 (이괄군의 눈을 뜨지 못하게 하려고)[* [[야인시대]]의 시라소니 린치 장면에서 마찬가지로 가루를 뿌려서 시야를 방해해서 성공시켰던 것을 생각하면 된다.] 고춧가루를 살포하는 [[화생방|화학전]]을 걸면서 전세는 이괄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운다. 돌풍에 이괄의 군기가 제대로 서지 못하고 자꾸 기우는가 하면 부장인 한명련이 화살에 맞아 부상으로 전선을 이탈하는데, 때마침 한명련과 외모가 닮은 이양이란 군관이 탄환에 맞아죽자 남이흥이 기지를 발휘해 '역적 한명련이 죽었다! 역적 이괄이 도망친다!' 라고 외쳤고 화학전 상황이라 눈이 보이지 않던 이괄의 군대는 그 소리를 듣고 진짜 우리가 정말로 졌나 하면서 사기가 떨어지며[* 애초에 이괄이 데려온 정예 병사들은 이괄의 명령이 아니었으면 같은 조선군과 싸울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이괄의 지휘 능력이 관군 지휘관들에게 압도적으로 이기는 입장이 아니라는 불안감이 현실화되자 더 이상 싸움을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괄 등의 명령도 무시하고 전부 도망가서 와해되고 만다. 여기서 패병 400여 급의 머리를 베고 3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괄 측은 숫자·숙련도·사기까지 절대적으로 우세했으므로 더 공세를 퍼부었으면 정충신의 군대는 패배했을 것이고, 관군의 본대를 이끌었던 도원수 장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상황이어서, 관군 입장에선 말 그대로 기적같은 역전승이었다.[* 실록에서도 승장인 정충신이 "하늘이 도와 이겼다"고 말했다고 되어 있다. 뒤집어서 보자면 스스로 사지에 들어가서 진을 쳤던 정충신의 깡이나, 황주 전투에서부터 미약한 병력으로 이괄을 상대했던 관군 장수들의 용기도 대단했지만.] 반군은 죽음을 면할 겨를이 없어 민가에 달아나 숨기도 하고 마포 서강으로 달아나 강물에 빠져 죽는 자도 있었다. 관군 지휘관으로 참전한 충무공 [[이순신]]의 서자 이신은 이 격전의 와중에 전사했다. 전사자들 속에 섞여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무덤을 만들지 못했다.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 기록도 거의 없고, 정조때 증직을 시켜주려 했으나 전해줄 사람이 없어 하지 못했다.[* 이순신의 또 다른 서자 이훈은 정묘호란때 사촌형(이순신의 큰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역시 시신을 수습치 못해 무덤이 남아있지 않으며, 후손도 남기지 못했다. 이순신의 다섯 아들 중 3명이 외적과 맞서다 후사를 남기지 못한채 전사했고, 가계는 맏이 이회, 둘째 이예의 후손이 이어갔다.] 성벽 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한성 주민들은 이괄 군이 패배하자 직접 [[서대문]]을 지키던 이괄 군을 몰아낸 다음 성문을 걸어 잠가버렸고[* 관군이 포위망을 형성하면 이괄 측이 고립되리라는 점은 한성에서 생활하던 백성들의 눈으로도 명확했을 것이므로, 이괄 일당과 한편으로 취급돼서 반역죄로 연좌당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관군이 한성에 입성한 후에 무고하게 처형당한 사람도 있었다. 그나마 이런 사람은 극히 일부여서 별로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 결국 이괄 군은 성을 뺑 돌아 [[숭례문|남대문]]으로 겨우 입성하지만 지킬 병력이 없어서 한성에서 물러나게 된다. 사기가 오른 관군이 이괄을 추격하러 했으나 남이흥·정충신이 궁지에 몰린 적은 쫓으면 안 된다고 극구 말리며 '''이괄의 목은 앉아서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해 관군은 추격을 멈춘다.[* 이 전투의 승리 자체가 정충신 등의 소수 특공 작전으로 기어이 만들어낸 기적이었으니 이게 옳은 판단이었다. 이후에 이괄을 막던 부사 임회(송강 [[정철]]의 사위)는 잔당에게 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한편 [[삼국지]]의 소위 [[하북]] 평정 과정에서 [[동연]]으로 도망간 [[원소]]의 아들들을 추격하려는 [[조조]]를, 추격하면 뭉쳐서 대항할 것이지만 가만히 있으면 앉아서 목을 얻게 될 것이라며 말렸던 [[곽가]]가 연상되는 대목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